"상장 못 하면 5억" 약속, 왜 못 받았나
48개월 내 상장 실패 시 건당 5억원 위약벌, 대법원은 대주주의 귀책이 없다며 투자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 상장 실패만으로는 위약벌 청구가 인정되지 않는다
- 상장의무는 '결과'가 아니라 '노력' 채무로 본다
- 계약서에 귀책·평가 기준을 구체적으로 못 박아야 한다
2019년 5월, 한 투자자는 상환전환우선주(RCPS·일정 조건에서 상환·전환이 가능한 우선주) 1,550주를 약 10억원에 인수했다. 계약서에는 눈에 띄는 조항이 있었다. '48개월 안에 상장한다. 위반하면 건당 5억원을 위약벌로 문다.' 시한이 지나도 상장은 이뤄지지 않았다. 투자자는 약속대로 위약벌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돈을 물어줄 필요가 없다고 봤다. 왜일까.
상장의무는 '결과'가 아니라 '노력'이다
핵심은 상장의무의 성격이다. 채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결과를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하는 결과채무, 그리고 목표를 향해 성실히 애쓰면 되는 수단채무다. 물건을 넘기거나 돈을 갚는 일은 결과채무다. 반면 상장은 회사 혼자 힘으로 완성할 수 없다.
상장은 거래소 심사, 시장 상황, 실적, 기관 수요 등 회사가 통제하지 못하는 변수에 좌우된다. 대주주가 아무리 준비해도 시장이 얼어붙으면 상장은 미뤄진다. 법원이 상장의무를 수단채무로 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장하겠다'는 약속은 '상장을 위해 합리적으로 노력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원심(서울고법 2025나206544)은 이 논리에 따라 투자자의 청구를 기각했다. 상장이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계약 위반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상장 실패하면 위약벌 받을 수 있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상장이 무산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어렵다. 위약벌(계약 위반에 대한 제재로 미리 정해 둔 벌금 성격의 돈)이 발동하려면 대주주의 귀책사유, 즉 '해야 할 노력을 하지 않은 잘못'이 있어야 한다.
대법원은 2026년 8월 13일 선고한 2026다201223 판결에서 대주주에게 귀책사유가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대주주가 상장 준비를 게을리했거나, 고의로 상장을 무산시켰다는 사정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력할 의무를 다했다면 결과가 나쁘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반대로 대주주가 상장 절차를 방치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상장을 막았다면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위약벌 조항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방아쇠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잘못'에 맞춰져 있다는 뜻이다.
위약벌 조항은 왜 힘을 잃었나
조항 자체는 강력해 보였다. '48개월'이라는 명확한 기한, '건당 5억원'이라는 구체적 금액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은 조항이 '상장이라는 결과'에만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계약서에 상장의무를 적었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결과채무가 되지는 않는다. 법원은 계약의 문언뿐 아니라 거래의 성질, 당사자의 의사, 상장의 구조적 불확실성까지 종합해 채무의 성격을 판단한다. 상장처럼 외부 변수가 큰 목표일수록 수단채무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그래서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투자자라면 계약 단계에서 '무엇을 위반으로 볼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못 박아야 한다. 단순히 '상장한다'가 아니라, 상장 주관사 선정, 예비심사 청구, 필요 서류 제출 같은 이행 단계별 의무를 나눠 적는 편이 안전하다. 각 단계를 지키지 못하면 위약벌이 발생하도록 설계하면, 결과가 아닌 과정의 불이행을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상장이 무산됐을 때를 대비한 '출구'를 병행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RCPS의 상환권 조건, 풋옵션(정해진 가격에 되팔 권리), 이자·프리미엄 조항을 함께 설계해 두면 상장 실패가 곧바로 투자금 회수 실패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대주주라면 상장 노력의 기록을 남겨 두는 것이 방어의 핵심이다. 이사회 의결, 주관사와의 협의, 심사 대응 자료 등은 '합리적 노력을 다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번 판결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약속의 문구보다, 그 약속이 '결과'를 겨냥했는지 '노력'을 겨냥했는지가 승패를 가른다.
자주 묻는 질문
주주간계약에 상장 조항을 넣으면 무조건 이행을 강제할 수 있나요?
조항이 있다고 결과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장은 외부 변수가 많아 노력의무(수단채무)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고, 이때는 대주주가 합리적 노력을 다했다면 결과가 나빠도 책임을 묻기 어렵습니다. 이행 단계를 구체적으로 나눠 의무화하는 설계가 필요합니다.
위약벌과 위약금(손해배상 예정액)은 뭐가 다른가요?
위약벌은 위반에 대한 제재 성격이라 손해와 별도로 청구할 여지가 있고, 손해배상 예정액은 손해액을 미리 정한 것으로 봅니다. 다만 법원이 과도하다고 판단하면 감액될 수 있으며, 어느 쪽이든 발동의 전제인 '위반 사실'과 '귀책'이 인정돼야 합니다.
상장이 무산됐을 때 투자금을 회수할 다른 방법은 없나요?
RCPS라면 상환권 행사, 풋옵션, 정해진 수익률 보장 조항 등을 함께 계약에 담아 두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상장 위약벌 하나에만 의존하면 이번 사례처럼 회수가 막힐 수 있으니, 출구 조항을 이중으로 설계하는 편이 안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