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소송이 10년 넘게 끝나지 않는 이유
제품과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피해자가 증명해야 한다는 원칙이, 이 소송을 법정에 붙들어 두는 핵심이다.
- 제조물 피해는 피해자가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해 소송이 길어진다.
- 판례는 입증 부담을 일정 부분 덜어 주는 완화 법리를 인정해 왔다.
- 진단·노출 기록과 전문가 감정을 초기에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2026년 9월 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옥시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둘러싼 손해배상 소송의 8차 변론이 열렸다. 이모 씨 외 8명이 대한민국을 비롯한 4개 피고를 상대로 낸 사건이다.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지 1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사건은 여전히 결론이 아니라 변론 절차에 머물러 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 답의 상당 부분은 '누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라는 입증책임 문제에 있다.
왜 피해자가 원인을 증명해야 하나
민사소송의 대원칙은 '주장하는 사람이 증명한다'는 것이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피해자가 ① 제품에 결함이 있었고 ② 그 결함 때문에 ③ 피해가 발생했다는 연결고리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제조물책임법(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신체·재산에 손해가 생겼을 때 제조업자의 책임을 정한 법률)이 있어도 이 구조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화학물질로 인한 건강 피해가 이 증명에 가장 취약한 유형이라는 점이다. 폐 손상 같은 질환은 원인이 여러 갈래일 수 있고, 노출 시점과 발병 시점 사이에 긴 시간이 놓인다. 제품 성분이 실제로 몸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고도의 의학·독성학 판단을 요한다. 개인이 이 모든 고리를 과학적으로 완벽히 이어 붙이기란 사실상 어렵다.
그럼 피해자는 어떻게 증명하나요
법원도 이 어려움을 오래전부터 인식해 왔다. 그래서 공해·의약품·제조물처럼 피해자와 가해 기업 사이에 정보·전문성 격차가 큰 사건에서는 입증 부담을 덜어 주는 법리가 발전했다.
핵심은 '개연성' 접근이다. 피해자가 결함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자연과학적으로 100% 규명하지 못하더라도, 결함 있는 제품이 정상적으로 유통·사용되던 중 손해가 발생했고 다른 원인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는 사정을 상당한 정도로 증명하면,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박의 부담이 제조업자 쪽으로 넘어간다. 제조업자가 '자기 제품 때문이 아니다'라는 사정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워지는 구조다.
다만 이 완화 법리가 자동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는 여전히 제품에 노출된 사실, 노출의 정도, 그 시기와 질환의 연관성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의무기록, 노출 이력, 전문가 감정이 승패를 가른다. 소송이 길어지는 것도 이 감정과 검증에 오랜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국가를 상대로 한 배상은 또 다른 문제다
이번 소송에는 제조사뿐 아니라 국가도 피고로 포함돼 있다. 국가배상(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손해가 생겼을 때 국가가 지는 책임)은 제조물책임과 요건이 다르다. 규제·감독 권한을 가진 국가가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은 것이 위법한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따져야 한다.
행정청의 권한 불행사는 원칙적으로 재량의 영역이지만, 국민의 생명·신체에 대한 위험이 구체적이고 임박했는데도 손 놓고 있었다면 그 부작위가 위법하다고 평가될 여지가 생긴다. 제조사 책임과 국가 책임은 별개의 논리로 다뤄지며, 하나가 인정된다고 다른 하나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제조물 피해를 겪었다고 판단된다면, 소송의 성패는 초기 자료 확보에서 갈린다. 첫째, 제품 사용 사실과 기간을 입증할 자료(구매 기록, 사진, 제품 정보)를 남겨 둔다. 둘째, 진단서·검사 결과 등 의무기록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 노출과 발병의 연결을 보여줄 수 있게 한다. 셋째, 환경·독성 분야 전문가 감정이 사건의 무게중심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감정에 대비한 자료를 미리 갖춰 둔다.
소멸시효(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일정 기간 뒤 청구가 제한되는 제도)도 놓치기 쉬운 함정이다. 손해와 가해자를 안 시점을 기준으로 기간이 진행되므로, 피해를 인지했다면 시효를 확인해 대응 시점을 미루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소송이 길다는 사실 자체가 이 유형의 다툼이 얼마나 정교한 증명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준다.
자주 묻는 질문
가습기살균제 손해배상, 개인이 인과관계를 다 증명해야 하나요?
원칙은 청구하는 쪽이 증명하지만, 법원은 제조물·환경 피해에서 입증 부담을 덜어 주는 개연성 법리를 인정해 왔습니다. 노출 사실과 다른 원인의 개입 여지가 적다는 점을 상당히 증명하면 인과관계가 추정되고, 반박 책임이 제조사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노출 이력과 의무기록 제시는 여전히 피해자의 몫입니다.
국가를 상대로도 배상을 받을 수 있나요?
국가배상은 제조사 책임과 요건이 다릅니다. 규제·감독 권한을 가진 국가가 구체적이고 임박한 위험을 방치한 것이 위법한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별도로 따집니다. 제조사 책임이 인정돼도 국가 책임이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피해를 안 지 오래됐는데 지금 소송해도 되나요?
소멸시효는 손해와 가해자를 안 시점을 기준으로 진행되므로 사안마다 다릅니다. 시효가 지났는지, 중단·정지 사유가 있는지 개별 확인이 필요합니다. 인지했다면 대응 시점을 미루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